김나잇의 연극, 뮤지컬 관극일지
181129 루드윅(자첫) : 이주광, 김현진, 김려원, 함희수 본문
181129 루드윅
※스포일러 주의※
[베토벤 보러 갔다가 마리 슈라더에 반하고 나왔다]
최근 본 여성 캐릭터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이다. 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콕 박히고, 변화하는 과정마저 매력적이다.
'야 이건 대박이다' 정도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딱 한 명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중에서는 '대박이다'싶은 느낌. 제목은 루드윅이지만 여성 관객들은 마리가 마음에 콱! 하고 박혔을지도 모르겠다.
후반부에 마리가 외치는 "그래요. 하지만 그건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데, 바보 같은 남자들이 나와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에요!"라는 대사는 정말 시원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그건 거짓말이라고 일침을 놓는 베토벤에게 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하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대놓고 꼬집는 이 대사를 들으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고 아직도 그런 시대라는 점에서 답답하기도 했다. 자기 가슴을 팍팍 때리면서 절규하는 마리는 또 얼마나 답답했을까.
작품 속에서 마리는 발터의 선생님→15년 후 건축학도→도미니카 수녀님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자타공인이 인정하는 저돌적인 여성 마리는 잘 못하면 막무가내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건 아니다. 진취적이며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강단 있는 사람이다. 마리는 그 시대에 여성이 되기 힘든 건축가를 꿈꾼다. 그런 마리의 꿈을 응원해주는 헬무트 교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의 아들인 발터의 선생님이 된다(발터의 어머니는 발터를 낳고 돌아가심). 그러나 발터의 정식 양육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법원의 판결대로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발터가 베토벤에게 레슨을 받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왜 갑자기 베토벤이 끼는지 당황스러운 판결).
베토벤은 발터의 피아노 실력을 보고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청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라 누구를 가르칠 수 있는 형편도 아니라서 둘을 그냥 돌려보낸다. 결국 마리는 양육권을 얻지 못하고 발터는 친척이 있는 영국행 배에 올라탄다. 안타깝게도 배는 도보 해협에서 침몰하고 마리는 발터가 몰래 가지고 온 베토벤의 악보집을 돌려주면서 그를 원망한다. 이때 려원 배우의 "네! 좀 가르쳐 주시지 그러셨어요!"하고 울부짖는 연기가 너무 좋았다.
마리가 베토벤의 집에서 나가기 전 베토벤이 얘기한다.
"건축가의 꿈을 꾼다고 했나. 남는 건 비참함 밖에 없어. 다 포기해."
그러자 마리가 대답한다.
"포기하면 뭐가 남는데요? 비참함 뿐일지 몰라도 난 해볼 거예요.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싶은 만큼!"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게 바로 마리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건축가가 되고 싶어서 건축가인 헬무트 교수님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그의 아들을 맡아 키우려고 폭풍우 치는 밤에 베토벤을 찾아가기도 하고, 건축박람회에 설계도를 내기도 하고, 또 나중에는 수녀님이 되어 여자아이들에게 고등수학을 가르치기도 한다.
정말이지 그동안 여성 캐릭터를 피해자, 성녀, 창녀, 엄마 이 정도의 단순한 스펙트럼으로 나눈 작품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마리는 그 일 이후 15년간 남장을 하고 세계 곳곳을 여행했고 오빠의 이름으로 낸 설계도가 건축박람회에 뽑히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만난 베토벤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해도 결국 그건 거짓말이라는(맞는 소리긴 한데 그걸 당신이..) 말에 마음 한편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마리는 다시 여성의 옷을 입고 박람회에 갔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망해버리고 나왔다.
마지막에 수녀가 된 마리를 보면서 약간 당황하긴 했다. 왜 하필 마리의 마지막을 수녀로 정했을까 의아한 점도 있었다.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오히려 더 괜찮은 마무리가 아닌가 싶다. 마리는 수녀가 되어서 여학생들에게 고등 수학을 가르친다. 만약 마리가 건축가가 되는 엔딩이라면 뿌듯하고 좋긴 하겠지만, 그 시대에 베토벤이 계속 '여자가 건축가라.', '여자가 혼자서 세계여행을?'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 시대는 지금보다 더 차별이 심했던 시대니까..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남자 흉내를 내지 않는 마리의 모습 그 자체의 엔딩이다.
"저는 여전히 꿈을 꿔요. 내 꿈이 지금은 이뤄지지 않아도 그 꿈이 누군가의 꿈이 되고 또 누군가의 꿈이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마리는 꿈을 꾸는 여학생들에게 고등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 그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그렇게 꿈을 이루고 꿈을 꾸는 게 이어져서 세상이 변화하는 게 아닐까.
[아쉬운 스토리, 좋은 넘버]
베토벤이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나오는데 어린 베토벤, 청년 베토벤, 성인 베토벤 셋이 번갈아 나오고 한꺼번에 나오기도 한다. 좀 이해가 안 되는 감정씬도 있었다. 발터가 탄 배가 침몰하고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괴로워하며 "정작 죽고 싶은 건 난데 왜 이 어린것을 데려가시는 겁니까?" 하며 신을 원망하는 장면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능하지만 감정은 잘 모르겠는 느낌이다. 물론 잠깐 알게 된 아이가 죽었다고 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까지 슬퍼한다고? 싶은 생각이 들긴 했다.
극 내내 모든 사람이 소리치고 화내고 괴로워하고 오열한다. 특히 베토벤이 화낼 때는 귀가 좀 아프기도 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면서 말소리를 크게 내는데 귀가 어두운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얘기한다.
극이 이렇다 보니까 잔잔한 힐링극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추다.
그리고 베토벤과 어린 카를이 처음 만나서 놀아주는 장면은 약간 자체 인터.. 현실 삼촌 돼서 놀아주는 모습 귀여웠는데 나한테는 좀 그랬다.
거의 대부분의 넘버를 피아니스트가 무대 왼쪽에서 연주를 하는데 참 대단하다. 강피도 극초반, 극후반부에 연기를 하니까 이것도 재밌는 부분.
가장 마음에 드는 넘버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단연코 운명이다. 청력을 잃고 괴로워하다가 발터의 죽음까지 알게 된 후에 끝없이 무너지는 베토벤이 신을 향해 애원하고 원망하는 부분. 이때 청년역할이 무대 가운데 앞쪽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는데 나이가 든 베토벤이 뒤에서 마치 대천사처럼 나타나서 청년의 귀를 손으로 가린다. 그러면 양쪽에 있는 흰 조명이 손등을 쏘며 삐이-하는 이명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조용히 시작하는 운명. 이전까지 휘몰아치는 감정과 대사들 사이에서 나까지 몸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을 하고 있다가 너무 홀리한 장면에 나까지 거룩해지는 기분이다.
이때 청년과 나이 든 베토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청년 베토벤은 앞에서 나이 든 베토벤은 뒤에 서서 함께 지휘를 한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소름 돋았고 좋아하는 부분이다.
청년을 맡은 배우는 1인 2역을 하는데 초중반에 나오는 청년 베토벤과 중후반부에 나오는 베토벤의 조카 카를역이다. 베토벤은 카를을 아들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아끼고 사랑한다. 그래서 그가 자기처럼 음악가의 길을 걸으며 베토벤의 후계자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방향이 굉장히 잘 못되었다. 버젓이 카를의 엄마가 있는 상황에서 카를을 빼앗아와서 대신 키우고 그에게 억지로 음악을 가르치고 그를 압박한다. 이때 만난 마리가 카를을 위해서 베토벤에게 잘못되었다 얘기해주고 카를에게도 충고를 해주지만 결국 두 사람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린다.
카를이 자기는 음악 따위 하고 싶지 않다며 베토벤에게 소리치는 것을 베토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지로 그를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참 안타까운 장면이다. 카를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 싶고.
루트비히 반 베토벤. 원래 루트비히인데 왜 루드윅이라고 지었는지 극이 올라오기 전에 약간 논란이 있었다.
극 중에서도 루트비히라고 불리지만 카를만이 그를 루드윅이라고 한다. 루트비히라고 발음을 정정해주기도 하지만 카를은 장난을 치면서 계속 루드윅이라고 부른다. 결국 베토벤도 어리광이라고 생각하여 내버려둔다.
극의 후반부에 베토벤이 이런 얘기를 한다. "난 그저 카를의 루드윅 삼촌으로 남았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 이 말대로 정말 베토벤이 카를의 루드윅 삼촌으로 남았더라면, 카를이 엄마와 함께 살았더라면 둘 사이가 이 정도로 나빠지지도 않고 괜찮아졌을까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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